게임 속 공포는 단순한 놀람 효과를 넘어서 소리, 공간, 침묵, 거기서 느껴지는 미세한 불쾌감까지 모두 철저한 설계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11월 13일, 지스타 컨퍼런스(G-CON) 현장에서 진행된 '야마오카 아키라 프로듀서(사일런트 힐)'와 김태성 음악감독(파묘·사바하·명량)이 한 자리에 모여서 미디어가 주는 공포 사운드에 대한 대담을 열었다.
두 연사는 게임과 영화라는 서로 다른 매체에서 활동했지만, 공포·오컬트 장르가 가진 본질과 사운드 디자인의 방향성에 대해 놀라울 만큼 비슷한 시각을 공유했다. 이번 컨퍼런스는 단순한 음악 얘기가 아닌, 게임 사운드가 감각의 확장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 얘기하는 자리였다.
◇ 사운드는 시청각을 넘어 ‘공간’과 ‘촉각’을 만든다
야마오카 프로듀서가 사일런트 힐을 통해 구축한 음향 세계는 게임사에 남은 대표적 미학으로 자리잡았다. 그는 공포 사운드를 단순한 “무섭게 만드는 기법”으로 보지 않는다. 그는 “소리가 사람에게 온도, 습도, 냄새까지 상상하게 해야 한다”고 했다. 시각은 공간의 형태만 전달할 수 있지만, 청각은 더 정교한 감각을 자극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사일런트 힐 시리즈의 음향은 금속성 마찰음, 라디오의 주파수 잡음, 구조적이지 않은 기계음 등이 혼합되어 현실과 비현실 사이의 불쾌한 틈을 만든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정통 음악 이론에 기반한 접근을 경계했다는 것이다. “게임 음악은 교과서적인 방식에서 벗어나야 했다.”는 그의 말은 당시 업계 규칙에 대한 반항이기도 했다. 그가 추구한 방향은 멜로디보다 감각적 불일치였다. 화면은 말하고 있지 않은 무언가를 소리가 대신 말하는 방식, 서사와 공간의 ‘여백’을 소리가 메우는 방식이다.
◇ 김태성 감독이 말하는 “현실 기반 공포”
김태성 음악감독은 영화 '사바하', '파묘', '사제들' 등에서 한국적 공포의 사운드를 만들어온 인물이다. 그는 “초월적 존재가 갑자기 튀어나오는 공포보다, 현실에서 느끼는 이상한 순간의 기묘함을 더 좋아한다”고 말한다. 이런 취향은 작업 방식에도 단단히 스며 있다. 영화 '사바하' 작업 당시 그는 실제 티베트 승려의 소리를 녹음해 영화에 사용했고, '파묘'에서는 일본 승려를 초청해 주술적 음성을 활용했다. 공포의 리얼리티란 실제 소리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철학이다.
이어서 그는 공포 음악에서 중요한 것은 “관객이 기댈 곳 없는 순간”이라고 말했다. 음악이 한순간 사라지면 관객은 자신이 붙들고 있던 감정적 안전망을 잃는다. 그 공백에서 진짜 공포가 온다.
초반부 대담에서 보인 두 연사의 일치점은 '침묵의 활용'이었다. 야마오카는 침묵을 “소리가 존재하기 위한 대비(contrast)”라고 표현했다. 흰 종이 위의 검은 점처럼, 음의 부재는 오히려 감각을 더 예민하게 만든다. 김 감독 또한 “가장 무서운 순간엔 음악을 빼야 한다”고 단언했다.
◇ 소리의 ‘출처’가 아니라 ‘맥락’을 다루는 능력
두 연사는 악기가 아닌 '소리'를 어떻게 음악적 요소로 재해석하는지였다. 예를 들어 '파묘'의 사운드트랙에서 김태성은 북한 핵 경보음을 모티브로 한 사이렌콜을 활용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진짜 세계관 속에서 어떤 경험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였다.
야마오카 프로듀서 역시 사일런트 힐에서 라디오 노이즈를 대표적 공포 장치로 활용했는데, 이는 단순한 효과음이 아니라 '소리 자체를 공포의 상징으로 만드는 상징화 작업'이었다. 라디오 노이즈만 들려도 플레이어가 위협을 느끼게 만드는 심층 구조다. 그들은 모두 악기 여부를 따지지 않는다. 소리는 맥락을 얻는 순간 ‘음악’이 된다.
◇ 공포 사운드의 핵심: “이해되지 않는 느낌”
대담 말미에서 두 인물은 공통적으로 “불일치와 이해 불가의 감정”을 공포 표현의 핵심으로 보았다. 야마오카 프로듀서는 “매칭되지 않는 음악이 화면과 결합될 때 비로소 독특한 분위기가 생긴다”고 말했다. 그가 말한 “이상하다고 느끼는 순간의 힘”이 바로 사일런트 힐 특유의 공포를 만들었다.
김 감독 또한 오컬트 장르의 핵심을 “이질적인 경험을 관객에게 전달하는 것”으로 정의했다. 그는 영화 '82년생 김지영'의 심리 묘사에 돌고래 소리를 쓰기도 했는데, 전혀 어울리지 않아보이는 소리의 심리적 이질감이 관객에게 중요하게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 창작 과정 : ‘음악 감독은 사람을 본다’
김 감독은 자신의 작업 방식 중 가장 중요한 요소로 제작 감독과 함께 보내는 시간을 꼽았다. 그는 감독을 작업실 뒤에 앉혀놓고 하루 종일 작업 과정을 공유했다. 그 이유는 단순히 음악을 들어보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사고 과정’을 보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야 감독이 가진 세계관과 감정을 정확히 잡을 수 있다고 했다. 야마오카 프로듀서 역시 “말의 단어가 아니라 말하는 방식, 그 사람 자체를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감독이 무슨 음악을 원하느냐보다, 왜 그 말을 하는 사람인가를 이해하는 것이 사운드 크리에이터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좋은 사운드트랙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두 사람의 답은 “정답이 없다”였다. 김 감독은 “좋은 음악의 정의는 작품마다 달라지고, 항상 처음부터 다시 고민해야 한다”고 답한다. 장르·문제·세계관에 따라 해답이 매번 달라진다. 야마오카 프로듀서는 “좋은 사운드는 결국 ‘받아들이는 사람’의 기준이 만든다”고 말했다. 단순히 기술적 완성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작품과 맥락 속에서 어떤 감정을 이끌어내느냐가 핵심이다.
대담의 마지막에서 야마오카 프로듀서는 현재 창작자들에게 중요한 조언을 남겼다. AI의 등장과 툴의 진화로 제작 방식은 급격히 변하고 있지만, “변하지 않는 단 하나는 창작자의 정체성과 열정”이라고 말했다. 야마오카 감독은 “어떤 기술이 와도, 결국 만들고자 하는 의지와 자신만의 시각이 작품을 결정한다.”라고 했고 김 감독 역시 공감했다.
◇ 공포의 감각은 ‘보이지 않는 것’을 듣게 하는 기술이다
이번 지스타 대담은 단순한 음악 토크가 아니라, 게임 사운드가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에 대한 가능성을 보여줬다. 공포의 바탕에는 '놀람'이라는 감각 자체가 아니라 관객에게 질문을 주고 놀랄만한 감각을 상상할 수 있도록 설계하는 것에 있다. 음악이 주는 멜로디보다 공간, 냄새, 온도를 상상하게 하는 장치다. 침묵은 사운드의 일부이며, 현실의 소리에서 가장 깊은 공포가 태어난다. 창작자는 결국 사람을 바라보고, 감정의 결을 읽어야 한다.
사운드 디자인이 게임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앞으로 더 커질 것이다. 서로 다른 국가와 매체에서 같은 길을 걸어온 두 창작자가 말한 핵심은 '공포는 소리의 기술이 아니라, 감각을 설계하는 기술'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