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디렉터 이상균, 지승호, 최수현, 권명수, 만화가 이종범 / 게임와이 촬영
왼쪽부터 디렉터 이상균, 지승호, 최수현, 권명수, 만화가 이종범 / 게임와이 촬영

G-CON 2025에서는 '네오위즈', '라운드8' '팀 너프' 등 주요 개발사에서 내러티브를 이끌어온 디렉터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패널들은 게임 내러티브가 단순한 ‘텍스트 기반 스토리’가 아니라, 플레이어의 감정·행동·선택 전체를 움직이는 하나의 '설계'로 확장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게임이 더 이상 텍스트나 컷신으로 서사를 전달하는 시대가 아니며, 플레이 전체가 이야기의 매체로 작동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올해 지스타가 산업 침체 속에서도 의미 있는 담론을 제시한 이유는, 바로 이 '플레이어의 감정 경험 기반 서사'라는 기술이 한국 개발자들의 새로운 경쟁력이 될 수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 내러티브의 본질 - '게임은 관객이 아니라 행위자를 만든다'

첫 번째 화두는 '게임에서 좋은 내러티브란 무엇인가'였다. 패널들은 공통적으로 “목표와 동기 부여”, “플레이 상황과 서사의 일치”, “감정 이입 가능한 캐릭터”를 핵심 요소로 꼽았다. 하지만 접근 방식은 각자의 출신 배경만큼이나 달랐다.

전투 기획 출신 최주현 디렉터는 좋은 내러티브의 기준을 ‘행동의 명분’에서 찾았다. 유저가 어떤 전투를 수행할 때 왜 이 행동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 납득할 수 있어야 한다. 목표가 모호하면 몰입도는 무너진다는 설명이다.

반면 소설가 출신 권명수 디렉터는 ‘감정의 중력’을 강조했다. 플레이어가 시간을 잊고 캐릭터에 밀착하게 만드는 힘이 내러티브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흥미와 감정 이입은 게임 플레이의 원동력이다. 선택의 결과가 감정적으로 쌓일 때 플레이는 더 깊어진다.”라고 했다.

진승호 디렉터는 내러티브를 '단순 데이터 조각을 인간 경험으로 바꾸는 장치'라고 정의했다. “그림·음성·대사 모두 인터넷에 흩어져 있는 정보일 뿐이지만, 게임 속 맥락 안에서는 플레이어가 특정 캐릭터를 단순 이미지로 느끼지 않는다. 상호작용이 그 경험을 실존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이상균 디렉터는 게임만이 가진 결정적 차이를 “죄책감”이라는 감정에서 설명했다. 그는 영화 '세븐'과 게임 'Heavy Rain'의 구조를 비교하며 이렇게 말했다. “영화 속 관객은 주인공의 선택을 바라보며 연민을 느낀다. 하지만 게임에서는 플레이어가 직접 트리거를 당겨 누군가를 죽인다. 그 감정은 연민이 아니라 죄책감이다. 이것이 게임만의 내러티브다.”라고 했다.

지스타 2025 컨퍼런스 현장 이미지 / 게임와이 촬영

 


◇ 아이디어가 ‘이야기’가 되기까지 : 숙성, 거리두기, 그리고 실패

패널들은 아이디어 발굴과 관리 방식에서도 극명한 차이를 보였다.

이상균 디렉터는 수십 년 동안 쌓아온 메모 노트를 예로 들며 ‘장기 숙성’을 말했다. 300개 이상 저장된 플롯 중 일부는 20년 동안 묻혀 있다가 어느 날 조각처럼 돌아온다. “좋은 아이디어와 나쁜 아이디어의 차이는 결국 시간이 드러낸다”고 그는 말했다.

반대로 최주현 디렉터는 “진짜 좋은 아이디어는 따로 적지 않아도 다시 떠오른다”고 했다. 그는 메모보다 ‘생각의 반복’을 중시하며 불필요한 아이디어는 자연스럽게 잊히는 구조를 채택한다.

권명수 디렉터는 이를 보완하는 존재다. “지원 디렉터님은 메모를 안 해도 내 머릿속에 다 던지신다.” 그는 아이디어를 바로 판단하지 않고 ‘상자에 넣어두고 일정 기간 방치하는 방식’을 사용한다. 안개가 걷힌 뒤 다시 보면 다른 각도에서 장점이나 결함이 보이고, 그때 비로소 방향을 정한다.

진승호 디렉터는 아이디어 판단 기준을 “내가 겪은 감정을 플레이로 전이할 가치가 있는가”로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게임 검은방, 회색도시, 베리드 스타즈에서 경험을 플레이로 치환하는 과정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집요한 작업인지 언급했다. 이어서 “이 아이디어가 똥인지 된장인지, 그리고 이 고생을 할 가치가 있는지 스스로 판단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지스타 2025 컨퍼런스 현장 이미지 / 게임와이 촬영

 


◇게임 내러티브만이 가진 구조 - ‘플레이 시나리오’라는 제3의 층위

패널들은 게임이 다른 매체와 구별되는 지점을 ‘플레이 시나리오’라 지칭했다. 스토리·연출·대사가 아닌, 플레이어가 실제로 겪는 사건의 연속성이 하나의 서사가 되는 구조다.

최주현 디렉터는 피의 거짓을 예로 들며 “노트를 획득하는 순간에는 전투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이는 내러티브의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 설계된 균열 없는 리듬이다. “내러티브와 플레이의 충돌은 몰입을 무너뜨린다. 플레이 시나리오에서 얻는 감정이 본편의 감정보다 더 강한 경우도 있다.”

진승호 디렉터는 '회차 플레이'라는 개념을 강조했다. 첫 회차를 일부러 ‘모두 죽는 엔딩’으로 설계하여, 플레이어가 다음 회차에서 “이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하겠다”는 감정적 동기를 갖도록 만든 것이다. 플레이 경험이 이야기를 완성하는 구조적 사례다.

권명수 디렉터는 “게임은 XY 축 위의 서사 위에 Z축(플레이 경험)이 얹힌다.”고 정리했다. 동일한 서사도 플레이어의 행동에 따라 완전히 다른 의미로 변화하며, 누군가는 감동을, 누군가는 상실을 경험한다. 게임은 고정된 완결이 아니라, 유저의 경험으로 계속 다시 쓰이는 이야기라는 설명이다.

지스타 2025 컨퍼런스 현장 이미지 / 게임와이 촬영

 


◇ 마비노기 영웅전 개발비화, 의도된 상실감을 설계한 실험

세션 중 가장 강한 반응을 일으킨 순간은 이상균 디렉터가 마비노기 영웅전 시즌1 개발 당시의 비화를 전한 대목이었다.

그는 '퍼시스턴트 월드에서 반복 행동이 서사의 진정성을 파괴한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해, 유저에게 되돌릴 수 없는 상실감을 경험시키는 실험을 진행했다. 게임 시작 지점을 항상 ‘여관’으로 고정해 익숙함과 지루함을 누적시키고, 이후 주인공 NPC ‘티이가 떠난 뒤 여관의 배경음악과 NPC 자체를 완전히 제거했다. 로그인하면 당연히 있어야 한다고 믿었던 존재가 사라져 있는 것, 그것이 진짜 상실이라고 설명했다. 이 실험은 강렬했지만 일부 유저가 충격을 이유로 게임을 이탈하는 부작용도 발생했다. 그러나 그는 “그 순간만큼은 유저가 기존 MMORPG에서는 경험할 수 없었던 감정적 깊이를 느꼈다.”고 평가했다.

 


Q&A 정리

1. 내러티브 직군의 미래

디렉터들은 공통적으로 게임 내러티브 직군은 더 세분화되고 전문화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특히 AI·프로시저럴 내러티브 기술이 도입되면서, 플레이어 선택에 따라 실시간으로 변화하는 이야기 구조가 표준화될 것으로 내다봤다.

2. AAA(triple-A game)와 인디의 격차, 그리고 기회

대형 프로젝트일수록 시스템·전투·서사 간의 충돌을 관리하는 데 시간이 더 필요해진다. 반면 인디는 실험적인 서사 기법(예를 들어 언더테일, 디스코 엘리시움 같은 개인 감정 중심 구조)을 더 자유롭게 시도할 수 있다. 패널들은 한국 인디 내러티브 시장도 점점 성장할 것이라고 말했다.

3. ‘현대 게임 팬’이 원하는 서사

최근 팬들은 대사량이나 컷신보다 플레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서사적 순간을 더 선호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영상 스트리밍 시대이기 때문에 각자의 플레이 경험이 서로 다른 이야기가 되는 게임일수록 경쟁력이 높다.

4. ‘지스타 이후’ 한국 게임 내러티브의 방향성

패널들은 “한국 게임이 전투·시스템 중심 설계에서 벗어나 감정 구조와 세계관 설계를 더 강화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플레이어의 선택이 내러티브의 핵심이 되는 '참여적 서사'가 향후 5년의 대세가 될 것이라는 의견도 나왔다.

지스타 2025 컨퍼런스 현장 이미지 / 게임와이 촬영
지스타 2025 컨퍼런스 현장 이미지 / 게임와이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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