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PG 서사의 철학 : '클레르 옵스퀴르: 33 원정대', '디스코 엘리시움'의 이야기가 만들어지기까지
•내러티브 중심 G-CON 전면 공개 •두 작가의 RPG 서사 철학과 미래 전망 •로컬라이제이션과 다국적 언어 구조의 실험이 중요
G-STAR 2025 컨퍼런스의 세션 'Beyond the Boundaries of Narrative – Literary Experimentation and the Philosophy of RPGs'가 진행되었다. 연사로 참석한 '제니퍼 스베드버그-옌(Jennifer Svedberg-Yen /Sandfall Interactive 리드 라이터 / 보이스 & 로컬라이제이션 프로듀서)'와 'Robert Kurvitz(로버트 쿠르비츠 / '디스코 엘리시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대담을 바탕으로, 두 사람의 발언을 문답 형식으로 재구성했다.
사회자 (만화가 이종범):
먼저 두 분을 모시고, RPG 내러티브의 현재와 미래, 그리고 문학적 실험이라는 주제로 이야기 나눠보고자 합니다. 특히 ‘플레이어가 의미를 만들어가는 서사’라는 화두가 이번 세션의 핵심인데요. 제니퍼님, 최근 RPG 내러티브의 흐름 변화를 어떻게 보고 계신가요?
제니퍼 스베드버그-옌 :
저는 최근 RPG에서 스토리의 형식적 구조보다 ‘플레이어 경험 방식’이 점점 중요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과거 RPG는 기본적으로 플롯 중심, 즉 미리 설계된 이야기 흐름을 따라가는 구조가 많았죠. 하지만 요즘은 플레이어가 게임을 하면서 자신의 해석과 의미를 만들도록 설계된 이야기가 많아지고 있어요.
제가 참여한 '클레르 옵스퀴르: 33 원정대'도 그런 방향성을 강하게 반영했습니다. 보이스 녹음, 로컬라이제이션 과정에서 단순히 텍스트를 옮기는 것을 넘어서, 감정의 뉘앙스, 문화적 맥락, 언어 고유의 리듬 등까지 고려했죠. 제가 보는 ‘이야기 실험’은 결국 언어 + 미디어 + 플레이어 상호작용이라는 삼각형 위에 놓이는 것이고, 이 삼각형이 균형을 이룰 때 진정한 내러티브 혁신이 일어난다고 생각합니다.
로버트 쿠르비츠 :
제니퍼의 분석이 매우 설득력 있다고 생각합니다. RPG는 이미 단순한 ‘이야기 전달 장치’를 넘어섰어요. 우리가 〈디스코 엘리시움〉을 만들 때 의도했던 것도, 플레이어가 끝맺음이나 해석을 직접 경험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RPG를 새로운 문학 장르로 보는데, 그 이유는 전통 문학이 ‘텍스트 + 독자’였다면, RPG는 여기에 ‘시스템 + 플레이어’가 들어가면서 더 복합적인 서사의 가능성을 열어주기 때문입니다. 이 점이 문학적 실험, 특히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데 있어서 아주 강한 무기가 된다고 봐요.
사회자 :
두 분이 공통적으로 ‘플레이어의 의미 창조’를 강조하셨는데, 실제 개발이나 설계 과정에서 가장 어려웠던 과제는 무엇이었나요?
제니퍼 스베드버그-옌 :
로컬라이제이션 쪽에서 가장 큰 도전이었습니다. 영어로 쓰인 대사가 한국어나 일본어, 혹은 다른 언어로 번역될 때, 단순히 단어를 바꾸는 것만으로는 동일한 감정 흐름이나 여운을 유지하기 어렵거든요. 글자 수, 언어의 리듬, 문화 참조 등이 각 언어마다 다르기 때문이죠.
그래서 저희는 원본 텍스트 단계부터 로컬라이저를 참여시키고, 녹음한 보이스 연기도 번역된 대사에 맞추어 여러 번 다시 녹음하고 검토했습니다. 이런 반복 작업이 없으면, 플레이어는 ‘이 장면에서 느껴야 할 것’을 언어 장벽 때문에 잃을 수 있어요.
로버트 쿠르비츠 :
저에게 가장 힘들었던 건 서사 설계와 시스템 설계 사이의 균형이었습니다. 스토리가 너무 강조되면 플레이어가 상호작용 시스템을 놓치게 되고, 반대로 시스템이 너무 강하면 이야기는 흐트러질 수 있죠. 〈디스코 엘리시움〉에서는 이를 ‘정신적 탐험 메커니즘(mental exploration mechanism)’이라는 틀로 묶었습니다. 예컨대 플레이어가 내면의 목소리(생각)를 대화하듯 대화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건 단지 내러티브적 장치가 아니라 시스템의 일부입니다. 즉, 시스템이 이야기에 직접 기여하고, 이야기가 시스템의 일부로 기능하는 구조를 지향했습니다.
사회자 :
그렇다면, 앞으로 RPG 내러티브에서 두 분이 기대하거나 실험해보고 싶은 새로운 방향이 있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제니퍼 스베드버그-옌 :
저는 앞으로 '언어 간 간극(inter-lingual gap)'을 활용한 실험이 더 많아질 거라고 봅니다. 예컨대, 플레이어가 한 언어로 들은 대사를 다른 언어로 번역할 때 의미가 일부러 흐려지거나 바뀌는 경험, 혹은 특정 문화적 참조를 번역하지 않고 남겨두어 플레이어가 ‘무엇이 빠졌는가?’를 느끼게 하는 설계.
이런 방식은 플레이어로 하여금 ‘미완의 텍스트’를 완성하게 만드는 역할을 주는 셈이고, 내러티브를 더욱 다층적이고 유연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로버트 쿠르비츠 :
저는 앞으로 RPG 서사의 '극단적 비선형성(non-linearity)'이 한층 더 발전할 거라고 믿습니다. 이야기의 중심이 시간, 공간, 선택 모두에서 흐트러지는 구조요. 예를 들어, 플레이어가 어떤 시점에서 게임을 시작했는지에 따라 완전히 다른 서사 경험이 펼쳐지도록 구성하는 거죠.
또 하나는 '세계의 기억(memory of the world)'을 시스템적으로 남기는 방식입니다. 즉, 플롯을 쫓는 것이 아니라 플레이어가 세계의 단서를 모으고, 그 단서들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해석과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구조요. 이런 접근이야말로 RPG를 문학적 실험의 플랫폼으로 만드는 진정한 가능성이라고 봅니다.
사회자 :
매우 강한 비전이네요. 마지막으로, 한국을 포함한 국내 개발자나 스토리팀에게 조언을 한 말씀 해주신다면요?
로버트 쿠르비츠 :
스토리팀과 시스템팀이 더 긴밀하게 협업하길 권합니다. 많은 경우, 내러티브 팀이 ‘글을 잘 쓴 것’에 만족하지만, 그 글이 시스템 속에서 어떻게 작동할 것인지는 간과되는 경우가 있어요. 서사와 시스템이 분리되어 있으면, 플레이어 경험이 흩어지고 의미가 약해질 수 있습니다. 서로의 설계 언어를 이해하고 함께 설계해야 진짜 강한 내러티브가 나옵니다.
제니퍼 스베드퍼그-옌 :
저는 ‘로컬라이제이션(번역)’을 끝이 아니라 과정으로 보는 시각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많은 스튜디오에서는 텍스트를 먼저 쓰고, 마지막에 번역팀이 들어가지만, 저는 초기 설계 단계부터 다양한 언어와 문화에 대한 고려를 병행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해야 플레이어의 감정이 문화적 장벽 때문에 손상되지 않고, 진정한 서사 경험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아래는 부가 논의와 인사이트를 정리한 것이다.
문학 + 시스템의 융합
두 연사는 RPG를 단순한 ‘서사 전달 수단’으로 보기보다는, 문학적 실험이 가능한 복합 매체로 본다. 특히 시스템(게임 메커니즘)이 서사와 직접 맞물리는 방식은 전통 문학에서는 보기 어려운 구조다.
번역과 감정의 보존
제니퍼 스베드퍼그-옌은 로컬라이제이션에 감정적 깊이를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그리고 그걸 해결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반복과 협업이 필요한지를 강조했다.
미래 내러티브 실험
언어 간 실험, 극단적 비선형 구조, 세계의 기억을 활용한 시스템 설계 등은 앞으로 RPG의 가능성을 확장할 수 있는 방향으로 제시되었다.
창작자 간 협업 중요성
스토리팀과 시스템팀, 그리고 로컬라이제이션 팀까지 초기부터 긴밀하게 협업하는 것이 내러티브 게임의 질을 높이는 핵심이라는 지적이 반복되었다.
쿠르비츠의 감정적 철학
그의 최근 발언에 따르면, 그는 앞으로 '인간의 최악 면'을 사실적으로 드러내는, 더 어둡고 음울한 게임을 만들고 싶어 한다는 비전이 있다. 또한, 예술을 '모닥불'에 비유하며, 플레이어와 다른 사람들 간의 대화를 통해 그 예술이 살아 움직인다고 본다.
이번 G-STAR 컨퍼런스는 이야기를 만드는 내러티브 철학자로서 두 사람이 어떤 게임 서사의 미래를 그리고 있는지를 보여줬다. 그들은 플레이어의 참여, 언어의 다층성, 시스템과 스토리의 상호작용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논의는 앞으로 한국 게임 개발자들에게도 실질적인 영감이 될 것이다.